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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수지역존치논란…③위수령으로 짓밟힌 시민의 목소리

민주주의가 군화로 밟혔던 세 가지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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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이데일리)

 

 

 

 

 

 

 

 

 

 

 

 

지난 11일 정부는 국무회의에서 위수령을 폐지했다. 지난 4일에는 국방부가 위수령 폐지령안을 입법예고하면서 “최근 30년간 시행 사례가 없는 등 실효성지난 11일 정부는 국무회의에서 위수령을 폐지했다.

지난 4일에는 국방부가 위수령 폐지령안을 입법예고하면서 “최근 30년간 시행 사례가 없는 등 실효성이 낮고 상위 근거 법률 부재로 위헌 소지가 많다”고 설명했다.

위수령은 군사시설물 보호와 치안 유지를 목적으로 육군부대가 주둔할 수 있도록 규정한 대통령령이다. 박정희 정권은 민주화운동과 시위를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1965년, 1971년, 1979년 세 차례에 걸쳐 위수령을 발령했다.

위수령은 군부대가 한 지역에 계속 주둔하며 지역의 경비와 시설물의 보호를 위해 제정했으나 취지와는 달리 시위 통제에 오용됐다.

1965년 위수령은 한일협정 반대운동의 목소리를 틀어막았다. 한일협정에서 일본은 식민지 수탈을 시인하지 않았고 그와 관련한 어떤 보상도 하지 않았다.

이에 조인 무효화와 협정 비준을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학생들은 ‘박정권 하야! 여야 정객의 반성촉구! 부정부패 원흉 처단!’등의 구호를 외치며 민주주의를 강조했다.

그해 4월 동국대에 재학 중이던 김중배가 경찰의 곤봉에 맞아 사망하자 시위는 더욱 격화됐다. 8월에는일 고려대에 무장군인이 난입해 학생들을 군화로 짓밟았다. 다음날 박정희 정권은 위수령을 선포하고 한일협정반대운동을 종결시켰다.

1971년 박 정권은 부정 선거 규탄시위에 위수령을 악용했다. 당시 연임 중이던 박정희 대통령은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박정희는 3선 개헌을 통해 장기집권의 길을 열었고 결국 당선됐다.

이후 신민당은 전국적으로 조직된 선거 부정이었다고 주장했다. 김영삼의 측근인 최형우는 자신의 고향이자 지역구인 울산 울주군에서 자신의 친인척만 500명이 넘는데 어떻게 5표만 나올 수 있느냐며 울분을 토했다.

이에 대학생들은 민주화 시위를 벌였지만 박 정권은 위수령을 발동시켜 주요 시위 가담자들을 체포했다.

1979년 부산과 마산에서 박정희의 유신 독재 체제에 대한 불만이 폭발했다.

부마항쟁은 대학생과 고교생뿐만 아니라 노동자·폭력배·종업원 등 많은 시민이 대거 가세했다. 민주주의를 울부짖는 목소리가 시내 곳곳을 메웠다. 더욱 확산할 조짐이 보이자 박 정권은 계엄령과 위수령을 발동해 1563명을 연행하고 125명을 군사재판에 넘겼다.

독재정권의 잔재로 여겨졌던 위수령이 68년 만에 폐지됐다. 이에 문재인 대통령은 “참 감회가 깊다”고 짧게 소회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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