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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쉬어가면 어때"…갭이어 확산



(사진=말리아 오바마 트위터 캡쳐)


손용주(28)씨는 다니던 회사를 퇴사했다. 대학 졸업 이후 좋은 회사에 취직했지만 일에 치여 너무 힘들었다. 퇴사를 선택한 후 1년 간 휴식하며 자기 계발과 새로운 취미생활을 시작했다. 다시 취업해야 한다는 압박감보다는 오히려 여유를 되찾아 행복하다고 했다. 손씨는 “새로운 환경을 경험하고 무엇보다 주체적으로 기회를 만들어 휴식과 자아탐구의 중요성을 체감해 뿌듯하다”고 말했다.

최근 자아를 찾아 여행을 떠나거나 잠시 하던 일을 그만두고 자기 계발에 나서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외국에서는 '갭이어(Gap year)'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갭이어족‘이 늘고 있다. 고등학교부터 대학, 그리고 취업의 문턱을 넘는 순간까지 한국인에게 휴식이란 현실적으로 꿈이나 마찬가지다.

갭이어(Gap Year)는 1960년대 영국에서 처음 시작했다. 학업을 병행하거나 잠시 중단하고 여행이나 봉사활동, 인턴 경험, 창업 등 다양한 사회경험으로 자신이 나아갈 방향을 찾는 기간을 말한다.

고교 졸업과 대학 입학 진학 사이에 나타나는 외국형 갭이어와 달리 한국형 갭이어는 대학생과 직장인들 사이에서 많이 등장한다.

대학생들은 휴학으로 직장인들은 휴직이나 퇴직을 통해서 휴식기를 가진다. 물론 복학과 재취업이라는 숙제가 남아 있지만 충전의 시간을 가지며 삶의 만족도를 높인다. 우리나라 곳곳에서도 여행, 인턴, 봉사 등 갭이어 장려 사업을 펼치고 있다.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딸도 선택

지난 2016년 미 하버드대에 합격한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딸 말리아 오바마가 입학을 한 해 미뤘다고 발표해 화제가 됐다.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대학에 입학하는 대신 1년간 갭이어를 통해 다양한 경험을 쌓겠다고 했던 것이다. 미국에서는 말리아 오바마를 통해 갭이어가 더 유명해졌다.

갭이어를 한 유명인 중에서는 영국의 엠마 왓슨, 윌리엄·해리 왕자 등이 있다. 두 영국의 왕자는 2000년대 초 각각 칠레와 호주에서 갭이어를 보냈다. ‘봄봄봄’의 로이킴도 갭이어를 활용해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우승해 꿈에 그리던 가수가 됐다.

최근 1년간의 세계일주를 마치고 재취업한 김지성(37)씨는 “ 400만원의 비행기 값만 마련한 채 세계 여행을 시작했다”며 “주위에서는 나이 들어 미쳤냐는 비난까지 들었지만 현재 처해 있는 환경에서 벗어나 새로운 환경과 사람들을 접하면서 자신과 내 삶을 한층 성숙하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사진=이미지투데이)


현실에선 '그림의 떡'

갭이어는 새로운 기회가 되기도 하지만 학생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비용이 드는 게 문제다. 미국엔 금수저가 아니면 엄두 내기 힘든 4만 달러짜리 갭이어 프로그램도 있다. 현실은 휴식을 위한 더 큰 용기를 요구한다.

대학에서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여유인 휴학마저 아르바이트나 취업준비를 위해 소비하기 바쁘다. 여행은 고사하고 아르바이트라도 안 했으면 하고, 퇴직은 고사하고 휴가나 썼으면 한다.

무엇보다 이렇게 되기까지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은 탓도 크다. 입학과 개강으로 대학 캠퍼스가 들썩이고 있지만 ‘휴학’을 택하는 대학생들도 적지 않다.

실제로 대학 졸업자의 절반가량은 휴학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대졸자의 휴학 경험 비율은 43.3%로 남자는 평균 2년 7개월, 여자는 1년 4개월이었다. 재학생들은 학자금이나 취업준비 등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휴학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대학생 이석형(24)씨는 “보통 20대 남자들은 군대 다녀오는 것 자체가 인생의 가장 큰 공백이라 생각한다”며 “제대 후에는 복학해서 학업을 이어가야 하고 졸업하면 바로 취업할 나이어서 갭이어는 꿈도 못꾼다”고 했다.

이씨는 “심지어 기업들이 갭이어 하고 온 경력자를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는 얘길 들을때마다 갭이어는 한국 사회에서 다른 세상의 이야기로 들린다”고 덧붙였다.

조한혜정 연세대 문화인류학 명예교수는 “시민 배당 제도나 모두가 휴가를 갈 수 있는 탁월한 제도가 있어야 한다”며 “20살 청년에게 돈을 줘서 1년 동안 자유롭게 너를 돌아보고 와라 이런 식의 메시지와 지원이 주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사진=서울특별시평생교육진흥원)


변화하는 청년 정책…갭이어 지원 확산

갭이어가 확산하자 청년정책에도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특히 각 지자체는 갭이어 프로그램을 내놓으면서 청년 지원 사업에 시동을 걸고 있다.

대표적인 곳이 제주특별자치도와 서울시다. 제주도는 자체적으로 갭이어 사업을 공모했다. 체험 기간은 약 20일로 제주도에 주소를 가진 만 19세~34세 사이의 청년은 누구든 지원할 수 있다.

갭이어 전문 컨설팅과 항공비, 숙박비, 식비 등 도외 체류비도 지원한다. 청년들이 도외에서 생활하며 다양한 것들을 체험하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제주 청년들이 시야를 확장하고 성장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목표다.

서울시는 올해 갭이어 사업으로 ‘2018 청년인생설계학교’를 추진한다. 지난해에 열린 ‘제3회 서울청년의회’에서 제안한 10대 정책 중 하나다. 서울에 거주하는 만 19세~29세 미취업 청년 200명을 모집했다. 이 학교는 9월부터 11월까지 3개월간 자아탐구와 사유하기 등의 카테고리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지난해 전주시도 더 지속 가능한 전주를 위한 ‘청년정책의 패러다임 전환, 일상의 회복’이라는 정책포럼을 개최했다. 청년정책의 변화와 제도, 제주형 갭이어 사례를 통한 청년정책의 새로운 방안을 모색했다. 청년이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며 기성세대와 소통하는 장도 마련했다.

이혜민 사이랩 청년활동가는 “유럽 등에서는 사회에 막 진입하는 청년에게 새로운 경험을 해서 생각을 확장할 기회를 반드시 얻게 한다. 한국 청년들도 자체 설문조사에서 82.1%가 지금의 삶을 멈추고 자기를 돌아보고 싶다고 했다”고 지적했다.

이 활동가는 “미국 아이비 리그에서 갭이어가 활성화한 이유는 대학에 합격한 입학생이 등록을 연기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라며 “국내 대학들은 등록금을 내야 휴학 등의 학사 행정업무를 볼 수 있어 입학생이 갭이어를 선택할 수 있도록 이러한 가능성을 열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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