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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킹덤’ 속 대모, 시신 빼돌려 피난길 오른 이유는?

'신체발부 수지부모'의 유교 사회
불교식 화장을 무너뜨린 매장 풍습
광복을 거치며 장례 방식은 선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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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공개된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 스틸컷 (사진=연합뉴스)

“3대 독자 귀하디귀한 내 아드님 시신에 털끝만큼이라도 손댔다간 가만두지 않겠다.”

지난 1월 첫 시즌이 공개된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의 대사 중 일부다. 양반댁 대모가 아들의 시체를 화장(火葬)하려는 현감에게 “양반을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이어 현감 옆에 서 있던 이방이 “맞습니다. 양반의 시신을 태운다면 지체 높은 분들의 반발이 심할 것입니다.”라며 거든다.

현재 한반도 북녘의 누군가처럼, 조선 시대의 최고 존엄은 단연 ‘양반’이었다. 극 중 밤이 되면 되살아나는 좀비들을 막기 위해 화장하는 것이 맞지만, 양반의 시신을 함부로 다룰 수 없으니 사건은 점점 미궁에 빠졌다. 결국 양반댁 대모는 화장하기로 결정된 아들의 시신을 빼돌려 피난길에 데려가기까지 한다. 왜 그랬을까? 왜 조선 시대 양반의 시신은 태울 수 없었을까?

화장이 성행했던 고려…불교의 윤회 사상

시체를 불에 살라 장사 지낸다는 의미의 화장은 불교식 장례법이다. 신석기 시대부터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고, 역사 시대에는 불교가 막 들어오기 시작한 삼국시대부터 기록됐다. 최초의 화장으로 기록된 이는 신라의 승려 자장(慈藏)이었다. 이후 문무왕, 원성왕, 신덕왕 등 신라 8명의 왕이 화장 풍습을 따랐다. 해골물 속 깨달음으로 유명한 원효대사가 입적한 분황사 분묘에서도 유골이 여러 봉안 단지의 형태로 발견됐다. 고승이 입적한 뒤 화장하면 사리가 나온다고 믿는 불교 문화를 중심으로, 승려의 유골을 석탑에 넣는 풍습이 성행했다.

사리가 봉안되었던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 (사진=이미지투데이)

고려 중기인 12세기 들어서는 왕족과 귀족, 평민 가릴 것 없이 화장 풍습을 따르는 경우가 많았다. 고려가 불교를 국교로써 숭상했기 때문이다. 백성들은 불교의 윤회 사상에 따라 시신을 화장하면 극락왕생하거나, 좋은 곳에서 환생할 수 있다고 믿었다. 화장 후 남은 유골은 재로 날리고 봉안 단지에 모아 매장했다.

유교가 지배했던 조선…처벌은 강화

유교를 기반으로 한 조선 문화가 형성되면서 화장 풍습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드라마 ‘킹덤’이 따르고 있는 시대 배경도 바로 이 조선 시대다.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고려 시대 말부터 전파되기 시작한 주자의 ‘가례(家禮)’였다. 가례는 화장을 오랑캐의 풍습이라고 보고, 시신에 수의를 입혀 싼 매장을 권했다. 조선은 이 가례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백성들의 집에 가묘를 세우도록 권하고 화장 풍습을 배격하기 시작했다.

윤리와 예, 효자의 도리를 설명한 맹자의 ‘등문공(滕文公)장구’에서도 화장보다 매장을 권하고 있는 당시 사회상을 엿볼 수 있다. 등문공장구는 “부모가 죽어도 장사 지내지 않는 시대가 있었다. … 부모가 죽자 시체를 들어다가 구덩이에 버렸는데 … 파리와 모기가 엉겨서 빨아먹고 있었다. … 자식은 집으로 가서 가래를 가지고 돌아와 흙으로 시체를 덮었다.”는 일화를 소개하며 매장 풍습을 강조했다. 유교와 공자, 맹자의 가르침을 따랐던 조선 사회에서는 등문공장구의 이야기가 곧 세상의 진리였다. 이 같은 효 사상에 따라 가족의 시신을 있는 그대로 매장하지 않고 불에 태워 장례 지내는 것은 인륜을 저버리는 일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시신에 수의를 입히고 온전히 매장하는 것이 당연한 풍습이었다. (사진=이미지투데이)

조선 사회가 화장을 금지했지만, 일반 백성들은 형편상 아예 화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례 비용을 절약하거나 불교를 따르는 이유에서 화장을 택한 사례도 적지 않았다. 또 승려들의 권유로 화장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화장을 금지하는 법은 태조 통치기부터 있었지만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지금보다 행정 범위가 훨씬 넓었고, 여러 전란을 거치며 치안이 부재한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화장을 모두 단속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특히 성종 통치기에 화장 풍습에 대한 반감이 심했다. 성종실록은 화장 풍습에 대해 “우매한 백성(愚民)들이 요승(妖僧)들에게 유혹당하여 화장을 하는 풍속이 늘어나고 있다.”고 기록했다. 신하들이 이같이 아뢰니 성종은 금지 규정을 천명하여 화장을 근절시키라고 지시했다. 화장을 한 자는 곤장 100대에 처하고, 자손으로서 조부모나 부모의 시체를 훼기하는 자는 참형에 처한다는 법이 시작됐다. 화장 풍습이 조선 사회에서 공식적으로 막을 내리게 된 시기다.

일제 강점기의 화장 장려, 선택하는 현대 장례

20세기 초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한반도는 다시 화장을 장려하는 사회를 맞게 된다. 일제는 1912년 6월 20일 총독부령 제123호로 ‘묘지 화장장 매장 및 화장 취체규칙’을 공포했다. 이 규칙에 따라 개인이 묘지를 세우는 것은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허락되지 않았고, 각 도에 화장장이 설치됐다. 일본은 장례를 더욱 효율적으로 하게 돕는다는 이유에서 이 법을 마련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실 일본의 의도는 매장 풍습을 따랐던 조선 민족의 전통과 정신을 말살하는 데 있었다.

화장을 장려했던 일제 강점기 ‘묘지·화장장·매장및화장취체규칙’. 광복 후 폐기됐다. (자료=국가법령정보센터 갈무리)

1500년 넘게 이어져왔던 화장 풍습은 해방 이후 일제 식민통치의 잔재로 여겨졌다. 생활개혁실천범국민협의회가 1998년 발표한 ‘화장시설의 실태 및 개선방안’에서 당시 국민들의 생각이 나타난다. 일제 강점기에 급격하게 늘어났던 국내 화장 비율은 1971년 7%까지 떨어졌다. 일본이 장려했던 화장 풍습에 대한 반감과, 조선 시대까지 명맥을 이어왔던 매장 풍습이 함께 표출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장의 번거로움과 비용 문제가 겹치면서 반감은 점차 사라져갔다. 7%에 그쳤던 화장 비율은 1970년대 말부터 다시 늘어나며 1997년 22.9%에 달했다.

드라마 ‘킹덤’에서 화장을 거부하고 시신을 피난길에 데려가기까지 했던 대모의 행동은 지금 사회에서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숭유억불과 가례, 등문공장구를 따르는 조선 시대라면 썩 이상한 행동도 아니다. 그 시대에는 양반의 시신을 함부로 대할 수 없었고, 화장 대신 시신을 온전히 매장하는 풍습이 양반으로서 ‘옳은 행동’이자 충효의 기본 원리였다.

현대에는 그 누구도 장례 방법을 강요하지 않는다. (사진=이미지투데이)

지금 우리가 사는 21세기는 시신을 태운다고 손가락질받지도 않고 불효자라고 참형에 처하지도 않는다. 장례 방식은 온전히 당사자의 유언 또는 유족들의 선택에 달려있다. 문화와 종교, 지배 계층에 따라 달라진 장례 문화는 다음 세대에서 또 어떤 모습으로 변화할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변함없는 것은 장례 문화는 시대와 문화에 따라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허무맹랑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점점 정보화 되는 사회를 생각했을 때 미래에는 고인을 온라인 네트워크 위에서 모시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스냅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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