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Z 세대를 위한 뉴스

snaptime logo

[갑자기 배낭여행] 실크로드 핫플 '사마르칸트'로 모여!

‘실크로드(Silk Road)’란 말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각종 물건과 상인들을 태운 낙타들이 줄을 지어 걸어가는 곳, 동양과 서양을 이어주는 문화의 교역로. 사실 우즈베키스탄의 주요 도시는 그 실크로드 한복판의 ‘핫플레이스’였다. 그 중에서도 ‘사마르칸트(Samarkand)’는 ‘동방의 낙원’, ‘중앙아시아의 로마’로 불릴 만큼 실크로드 교역을 통한 문화와 학문의 발전이 눈부셨던 도시다.

이를 증거하듯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실크로드 시대의 이슬람식 학교와 사원, 영묘, 그리고 천체 관측소를 보기 위해 오늘도 수많은 여행자들은 사마르칸트라는 오아시스로 발걸음을 옮긴다.

레기스탄 광장의 모습. 왼쪽부터 울루그벡 마드라사, 티라카리 마드라사, 시르도르 마드라사이다. (사진=공태영 인턴기자)


사마르칸트에 왔으면 여기부터, 레기스탄 광장

사마르칸트에 온 여행자가 가장 먼저 찾는 곳은 아마도 ‘모래의 땅’이란 뜻을 가진 ‘레기스탄(Registan)’ 광장일 것이다. 각종 엽서에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사마르칸트의 대표 아이콘 레기스탄 광장엔 3개의 ‘마드라사(madrasah, 이슬람 교육기관)’가 ‘ㄷ’자 모양으로 서 있다. 위 사진 속 좌측부터 순서대로 ‘울루그벡 마드라사(the Ulugh Beg Madrasah)’, ‘티라카리 마드라사(the Tilya-Kori Madrasah)’, ‘시르도르 마드라사(the Sher-Dor Madrasah)’이다. 얼핏 보면 비슷해 보이는 세 마드라사는 지어진 시기부터 입구와 내부의 문양, 장식까지 모두 달라서 풍부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티라카리 마드라사의 천장. 화려함에 빠져 있다 보면 목에 무리가 갈 수도 있다.(사진=공태영)


그 중에서 ‘원픽(one pick)’은 역시 티라카리 마드라사다. 이 마드라사 내부의 천장 장식은 화려하기로 유명한데, 보면 볼수록 빠져들어서 몇 분이고 계속해서 천장만 보게 만든다. 17세기 중반에 만들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정교하면서도 화려한 천장을 보고 있노라면, 이게 레기스탄 광장의 유일한 볼거리였더라도 이곳을 찾았을 거란 생각이 강하게 든다.

다른 모스크보다 훨씬 더 큰 위용을 자랑하는 비비하눔 모스크의 입구. (사진=공태영 인턴기자)


사랑과 죽음이 마주본다, 비비하눔 모스크&영묘

레기스탄 광장에서 가까운 곳에 또 다른 볼거리가 있다. 시르도르 마드라사 쪽으로 난 잘 닦인 길을 따라 광장 동북쪽으로 이동하면 중앙아시아 최대 크기의 ‘모스크(mosque, 이슬람 사원)’인 ‘비비하눔 모스크(Bibi Khanym Mosque)’가 나온다. 유명한 정복자 ‘티무르 칸(Timur Khan)’이 사랑하는 아내 비비하눔을 위해서 지었다는 비비하눔 모스크는 거대한 입구에서부터 여타의 모스크와는 다른 차원의 위압감을 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모스크 내부는 규모에 비해 볼거리가 많지 않다. 들어갈 수 있는 건물도 거의 없고, 건물 곳곳에 금이 가고 보수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의 색 차이가 다소 심해서 안타까운 마음이 많이 든다.

비비하눔 모스크 맞은편에 있는 비비하눔 영묘. 모스크에 앞에서 더욱 아담해보인다. (사진=공태영 인턴기자)


모스크 바로 맞은편에는 비비하눔이 잠들어 있는 ‘비비하눔 영묘(Bibi Khanym Mausoleum)’가 있다. 거대한 모스크 앞에 있어서 안 그래도 아담한 규모의 영묘가 더욱 작아보이는 건 사실이지만, 푸른색 돔과 밝은 상아색 건물의 조화는 초라함 대신 깔끔함과 단정함이 느껴지게 한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비비하눔 모스크를 짓던 한 건축가가 비비하눔에게 끈질기게 입맞춤을 요구한 끝에 결국 비비하눔이 입맞춤을 허락했고, 그 사실을 안 티무르 칸은 그 둘을 ‘미나렛(minaret, 모스크의 일부를 이루는 첨탑)’에서 떨어뜨려 죽였다고 한다. 사랑으로 지은 건물과 죽음으로 지은 건물이 마주 보는 곳에서 이 이야기를 들으면 꽤 묘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샤히진다 영묘에 있는 건물의 내부. 외부도 외부지만 내부의 장식도 상당히 화려하다. (사진=공태영 인턴기자)


그들이 죽음을 수식하는 법, 샤히진다 영묘

비비하눔 영묘에서 멀지 않은 곳에 규모와 분위기가 180도 다른 영묘군이 있는데 바로 ‘샤히진다 영묘(Shakhi Zinda Mausoleum)’다. 이슬람교의 창시자 마호메트(Mahomet)의 사촌인 쿠삼(Kussam)과 더불어 티무르 왕족의 묘가 모여 있는 이곳을 뒤덮고 있는 색깔은 ‘푸른색’이다. 각 영묘 입구는 번들거리는 푸른색 채유 타일로 화려하게 장식돼 있는데 꽃무늬와 각종 패턴, 코란 구절이 거기에 수놓아져 있다. 많은 관광객들이 외부의 아름다움에 매혹돼서 건물 내부는 들어갈 생각도 못한 채 사진 찍기 바쁘다.

서늘한 건물 내부로 들어가면 중앙에 관이 하나씩 자리 잡고 있다. 내부는 이곳이 무덤이란 사실을 잊을 만큼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공을 들여 장식돼 있다. 왕족의 죽음이긴 하지만 죽음을 표현하는 당시 사람들의 방식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여기서 죽음은 무거움도, 허무함도 아닌 화려함으로 표상된다. 이런 볼거리 때문에 이곳에는 기도를 드리러 오는 이슬람교도뿐 아니라 수많은 여행객들로 인해 사람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울루그벡 천문대에 있던 '육분의'의 일부. (사진=공태영 인턴기자)


별 볼 일 많았던 사람의 발자취, 울루그벡 천문대

우즈베키스탄을 여행하다 보면 ‘울루그벡(Ulugh Beg)’이란 이름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티무르 칸의 손자 울루그벡은 티무르제국의 문화적 황금기를 이룩한 왕으로 특히 천문학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가 직접 세운 ‘울루그벡 천문대(Ulugh Beg Observatory)’의 일부가 사마르칸트 동북쪽의 언덕 위에 남아 있다.

지어질 당시 세계에서 가장 시설이 좋았다는 울루그벡 천문대는 울루그벡 사후에 내분으로 파괴되어 지금은 ‘육분의(두 점 사이의 각도를 정밀하게 측정하는 광학기계)’를 지탱하던 지하 부분과 천문대의 기초만이 남아 있다. 비록 일부긴 하지만 남아 있는 옛 천문대의 부분들은 건축 당시 천문대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곳에서 울루그벡이 측정해낸 1년이 오늘날의 관측 결과와 1분 미만의 오차를 보인다고 하니 천문대는 당시 티무르 제국의 과학 기술력의 총체였다고 볼 수 있겠다.

천문대 옆에 있는 작은 박물관에는 당시 천문대에서 사용되던 관측기구의 모형과 그림이 전시돼 있다. 이곳을 둘러보면 뛰어난 기술력에 바탕한 관측 결과로 티무르 제국뿐 아니라 세계에 영향을 미친 울루그벡과 그의 천문대의 모습을 좀 더 자세히 그려볼 수 있다.

울루그벡 천문대 옆에 있는 박물관의 모습. 울루그벡과 천문대에 관한 다양한 자료가 전시돼 있다. (사진=공태영 인턴기자)


/스냅타임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