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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르포]"백발에 뒤늦게 펼친 꿈...런웨이 인생 2막 꿈꾸다"



"시선은 멀리 두고 정면 바라봐 주시고요, 좀 더 부드러운 워킹으로 걸어보실게요."

지난 7일 오전 서울 강남구 더쇼프로젝트 모델아카데미 시니어모델 클래스. 교실 한 가운데 길게 펼쳐진 런웨이에 선 수강생 10여명은 강사의 주문을 듣자 일사분란히 포즈를 바꿔 움직였다.

이들의 평균 나이는 60대~70대. 희끗한 머리카락, 손목과 얼굴에 희미하게 팬 주름이 세월을 가려주지는 못했지만 자세와 포즈, 눈빛만큼은 20~30대 현역 패션모델 못지 않게 살아있다. 10cm가 넘는 하이힐을 신은 채 대형을 바꾸고 포즈를 잡고 다시 걷기를 반복해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생계와 육아로 접어야 했던 전문 패션 모델의 꿈을 뒤늦게 이뤄보고자, 가정에만 헌신한 지난 세월을 보상 받고자, 자식을 떠나보낸 슬픔을 극복하고 나를 찾고 싶어서 등 수강생들이 이 자리에 모인 목적은 저마다 달랐다. 다만 이들 모두에게 런웨이를 누비는 행위 자체가 커다란 도전이자 해방감을 선사해주는 즐거움이라는 점은 확실했다.

지난 7일 서울 강남구 '더쇼프로젝트 모델 아카데미'에서 시니어모델 클래스를 수강 중인 수강생들이 런웨이에 서서 워킹 수업을 받고 있다. (사진=스냅타임)


평생 못 이룬 꿈 이제라도..."살아있음 느껴"

고령사회에 접어든 요즘 60대 이상 시니어들의 도전은 시장은 물론 문화생활까지 이끄는 트렌드의 한 축이 됐다. 이는 20·30대 트렌드 세터가 독점할 수밖에 없는 영역이라고 여겨지던 패션계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은발을 휘날리는 60~70대 모델들이 런웨이와 브라운관을 누비며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으니 말이다.

제2의 삶으로 모델을 꿈꾸는 시니어들도 많아지면서 시니어모델 자체를 수익을 창출하는 하나의 직업군으로 구축하려는 움직임도 생겨나고 있다. 스냅타임에서 시니어모델 수업 현장을 방문해 직접 그 열기를 확인해보았다.

교실로 들어서자마자 전신 거울을 보며 옷 매무새를 다듬고 워킹 및 포즈 연습에 열심인 시니어모델 수강생들을 만날 수 있었다. 청재킷과 부츠컷 청바지를 매치한 청·청 패션, 화려한 링 귀걸이와 핫 핑크 드레스, 은발에 매치한 올 화이트 의상 등 평균 60대 이상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개성 넘치고 세련된 패션들도 눈에 띄었다.

이 곳에서는 한 과정 당 주 1회 4시간 4개월씩 기초, 중급, 고급까지 총 1년에 걸쳐 시니어모델을 양성하는 클래스를 운영하고 있다. 최근 국내에 은발 신드롬을 일으키며 인기를 얻고 있는 시니어 모델 김칠두(64)씨와 최순화(76)씨도 이 곳에서 꿈을 키워 정식 모델이 됐다.

수강생들이 아카데미에 문을 두드리는 계기는 다양하다. 정영주 더쇼프로젝트 대표는 "젊었을 때부터 꿈이 모델이었는데 당시의 사회 정서와 분위기 때문에, 생계 등을 이유로 실천해보지 못했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대부분"이라며 "특히 여성분들은 결혼과 육아로 커리어가 단절돼 평생 하고 싶은 걸 못 해왔는데 이제라도 마음대로 살아보고 싶어 찾아왔다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이날 수업에 참여한 6년차 시니어모델 김경숙(63)씨는 "대학생 때부터 연기, 모델 등 나를 표현하는 일을 꿈 꾸꿔왔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여성이 부모님에게 '이런 걸 하고 싶다', '난 이렇게 살아야만 한다' 원하는 바를 강력히 피력하기 어려운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다"며 "열정을 감추며 살다가 외국계 기업에 취직했고 아이를 낳아 잘 키운 뒤 55세에 이제라도 꿈을 펼쳐보고 싶어서 직장을 정리했다"고 말했다.

이날 수업에서 만난 시니어모델 배하나(72)씨도 "17세때 모델 활동을 하다 결혼 생활로 중단했지만 늘 마음 속에 '난 이 일을 위해 태어났어'란 생각을 하며 살아왔다"며 "2012년부터 시니어모델 활동을 하다가 건강상의 문제로 3년을 쉬었고 다시 회복해 7개월 전 아카데미에 다시 등록했다. 지금은 마지막 남은 인생을 최대한 모델의 꿈을 위해 노력해야겠다는 마음이다. 나 혼자 걷는 길이 아니라 나와 같은 뜻을 품은 사람들과 교류하고 서로 응원하며 개척해나가는 길이라 행복하고 즐겁다. 이제야 살아있는 기분이 든다"고 입을 모았다.

정 대표는 "유럽 등 해외에서는 고령 모델들이 많지만 어릴 때부터 모델 활동을 지속해 40~50년 이상의 경력을 가진 베테랑 모델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우리나라의 경우처럼 뒤늦게 입문한 시니어모델들이 거의 없다"며 "우리나라에 늦깎이 시니어 모델들이 생겨나고 있는 건 패션 문화가 유럽처럼 역사가 깊지 않아서도 있고 당대의 사회분위기상 꿈을 희생하고 생계, 육아에 뛰어들어야 했던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왼쪽부터)시니어 모델 최초로 서울패션위크 런웨이에 올라 화제가 된 모델 김칠두씨와 최순화씨. (사진=더쇼프로젝트)


김칠두 신드롬에 문의 늘어...시니어모델 설 곳 늘려야 

시니어모델이 뒤늦게 대중들의 관심을 받으며 제2의 장래희망으로 떠오르게 된 데는 데뷔한 지 1년 반 만에 광고와 패션쇼에서 주목을 받는 아이콘으로 부상한 늦깎이 신인 모델 김칠두씨의 영향도 컸다. 김씨는 지난 3월 '2019 가을·겨울 서울패션위크'에 20,30대 젊은 모델들과 나란히 서서 업계는 물론 대중들에까지 화제가 됐다. 이어 젊은이들이 소비하는 스트릿 패션 브랜드와 대기업 통신사의 광고 모델로 잇따라 출연하는 기염을 토했다.

정영주 대표는 김씨가 인기를 얻는 이유에 대해 "대중들은 늘 새로운 것을 찾고 있다. 특히 20·30대 젊은이들은 본인들 나이대가 주로 입는 스트릿 패션 스타일의 옷을 멋지게 소화한 김칠두씨를 보며 신선함을 느낀 것 같다"며 "김씨가 기존 기성세대에 대해 갖고 있던 이미지를 깨면서 젊은이들에게 '나도 저렇게 자유롭고 멋있게 늙어야지'란 동기를 부여해주는 것도 한 몫했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시니어를 패션계에 주목시킨 주역은 김씨 뿐이 아니다. 김씨와 함께 더쇼프로젝트가 배출한 최고령 시니어 모델 최순화씨도 지난해 '헤라서울패션위크 가을·겨울(FW)'에서 패션 브랜드 '키미제이' 무대의 피날레를 장식해 화제가 됐다.

이들이 인기를 얻으면서 아카데미 수강을 문의하는 전화도 늘어났다고 한다. 정 대표는 "김칠두씨, 최순화씨가 대중들의 인기를 얻는 모습을 보며 내 일 처럼 기뻐하고 이를 통해 용기를 얻어 시니어모델의 꿈에 매진하는 수강생들이 많아졌다"며 "전보다 시니어모델 클래스 수강과 관련한 문의 전화도 늘어났다"고 귀띔했다.

지난 7일 오전 서울 강남 구 더 쇼프로젝트 모델 아카데미에서 열린 시니어모델 클래스에서 모델 최순화(오른쪽)씨가 다른 시니어모델 수강생과 함께 런웨이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스냅타임)


모델 최순화씨는 이에 대해 "이 나이에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100세 시대 이런 날이 오는구나 싶어 뿌듯하다"며 "다만 배움의 기회 뿐 아니라 시니어모델들이 계속 탄생해 꾸준히 활동을 할 수 있는 다양한 무대들이 앞으로 더 많이 생겨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 대표는 "시니어모델 교육을 진행하는 문화센터, 다른 모델 아카데미들은 정말 많지만 배움의 기회를 런웨이 무대에 서는 등 실질적인 활동과 연계할 수 있는 기회가 아직까지는 많이 없다"며 "하지만 수강생들이 이 교육을 진행하며 가장 원하는 건 배움보다는 직접 무대에 서서 관객의 환호를 받는 것이다. 이 때문에 시니어모델을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하나의 직업군으로 구축하고자 노력하고 있으며 마케팅 시장에 시니어모델의 비중이 더 커져나가길 희망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시니어모델 산업이 한 때 유행으로 끝날 것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고령화 사회에 접어든 이상 이는 분명 지속적인 흐름이 될 것이고 '제2의 김칠두씨'를 찾는 수요들이 많아질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스냅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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