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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배낭여행] 한식 먹고 한국말 쓰는 우즈베키스탄 여행, 참 쉽죠?

사마르칸트 레기스탄 광장에 위치한 티라카리 마드라사 입구. 화려하게 장식된 입구로 수많은 사람이 드나든다. (사진=공태영 인턴기자)


2017년에 우즈베키스탄을 여행했다. 상아빛 벽돌과 푸른빛 타일로 화려하게 장식된 모스크(mosque)와 마드라사(Madrasah), 흙빛 벽돌로 높이 세운 미나렛(minaret) 등 실크로드의 기억을 고이 간직한 우즈베키스탄은 자연의 아름다움에 취해 있던 중앙아시아 여행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럼 우즈베키스탄 여행을 3가지 키워드로 요약한다면? '실크로드 박물관'이나 마찬가지인 우즈베키스탄이었으니 특정 도시나 건축물일 것 같았지만 아니었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 3가지는 바로 '한식', '한국어', '역사'였다.

우즈벡 최애 음식이요? 김치찌개요!

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게 바로 '#먹방', ‘#먹스타그램’, ‘#맛있는_현지_음식’이다. 하지만 그건 현지 음식이 입맛에 잘 맞을 때의 얘기다. 중앙아시아에선 어딜 가나 고수와 양고기가 등장하는 데 그 둘을 모두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매 식사 시간이 인내와 고난의 시간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중앙아시아 여행을 하면서 먹는 즐거움이 없었다. 고수, 양고기를 모두 싫어하는 탓에 여행 기간이 길어질수록 한식을 먹고 싶은 마음이 더 강렬해졌다. 한식당을 찾아 헤매다가 타지키스탄의 수도 두샨베(Dushanbe)에 ‘아리랑(지금은 ‘가야’)’이란 유명한 한식당이 있다고 해서 가봤으나 방문 당시 수리 중이었다. 그곳 말고는 타지키스탄에서 한식당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우즈베키스탄에 들어갈 때까지 40여 일 동안 강제로 한식을 먹지 못했다.

타슈켄트 한식당에서 40일 만에 먹은 김치찌개는,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김치찌개였다. (사진=공태영 인턴기자)


그런데 우즈베키스탄은 달랐다. 중앙아시아 여행 중에 제일 맛있게 먹은 음식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우즈베키스탄 처음 도착해서 먹은 김치찌개’라고 답할 것이다. 우즈베키스탄을 여행하면서 이틀에 한 번 꼴로 한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그 정도로 한식당이 많은 곳이 우즈베키스탄이다. 수도 타슈켄트(Toshkent)는 말할 것도 없고, 페르가나(Fergana), 사마르칸트(Samarkand), 부하라(Bukhara) 등 유명한 도시들엔 빠짐없이 한식당이 있었다. 파는 메뉴도 참치 김밥, 떡볶이부터 제육볶음, 육개장, 그리고 치킨까지 굉장히 다양했다. 재외동포가 18만 명 이상 살고 있다고 들었는데 정말로 한식 먹기 딱 좋은 곳이었다. 덕분에 우즈베키스탄에선 확실히 식사 시간이 기다려졌다. 물론 가격이 착하진 않아서 항상 큰맘 먹고 한식당 들어간 건 비밀이다.

우즈벡 아저씨가 말하길 “친구야, 밥 먹어야지

K-POP이 이끄는 한류 덕분에 세계 곳곳에 한국어를 공부하고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외국인들이 늘고 있다. 중앙아시아에서도 가끔 한국말로 인사하거나 ‘구준표’, ‘사랑해요’ 같은 단어를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한류의 열풍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우즈베키스탄은 좀 많이 달랐다. 보통 한국 노래나 드라마로 한국어를 접한 외국인이 쓰는 한국말은 10~20대의 말투인데, 우즈벡에서 만난 한국말 하는 사람들은 40~50대의 말투를 닮아 있었다. 주로 택시 기사 아저씨들이 그랬는데 이유는 그분들이 한국에서 5년, 10년씩 일을 했었기 때문이다. 충남 당진, 경기도 평택, 안성 등지의 공장과 건설 현장에서 일했다는 얘기를 한국어로 말해줄 땐 외국인과 대화한다는 느낌은 전혀 없고 동네 아저씨와 얘기한다는 느낌이었다.

타슈켄트에서 페르가나로 갈 때 만난 택시 기사 아저씨가 제일 기억에 남는다. 외국인이 버스나 택시 정류장에 가면 호객 행위를 하는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들기 마련이다. 그 날도 기사들이 벌떼같이 달라붙어서 ‘헤이’, ‘페르가나?’를 외치는데 갑자기 “한국에서 왔어?”라는 말이 귀에 꽂혔다. 화들짝 놀라서 소리가 난 곳을 쳐다봤는데 한국 사람이 아닌 우즈베키스탄 아저씨가 있었다. 유창한 한국말로 인사말부터 흥정까지 해버리는 아저씨를 제칠 다른 기사는 없었다.

경기도에서 10년 넘게 일했다는 아저씨의 한국말은 절대 공부로는 습득할 수 없는, ‘생활 한국어’였다. 특히나 ‘야’, ‘저기’, ‘손님’이라고 부르는 대신 ‘친구야’라는 호칭을 쓸 땐 외국인에게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었던 정감이 느껴졌다. 나이를 물을 땐 “친구는 몇 살이야”, 식당에 들러서 밥을 먹을 땐 “친구야 밥 먹어야지” 라고 말하던 아저씨. 한국에서 일했을 때의 사장님과 지금도 연락을 한다며 ‘카카오톡’ 대화를 보여주던 아저씨 덕분에 페르가나로 가는 길은 편하고도 흥미로웠다.

부하라에 있는 이스마일 사마니 영묘. 10세기에 지어져서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살아 있는 역사'다. (사진=공태영 인턴기자)


역사 앞에 선 인간은 한없이 작다

우즈베키스탄은 살아 있는 역사 교과서다. 실크로드 교역이 활발했을 당시 ‘중앙아시아의 로마’로 불렸던 사마르칸트엔 유명한 ‘티무르 칸(Timur Khan)’의 무덤과 ‘울루그벡(Ulughbek)’의 천문대가 있고, 2500년의 세월을 간직한 부하라와 종교 도시 히바(Khiva)의 ‘올드 타운(Old Town)’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과거의 모습이 잘 보존돼 있다. 실크로드 이전부터 몇천 년 동안 그 자리를 지켜온 도시들은 그 자체로 문화 유적인데, 그곳들을 보면서 역사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예전엔 과거를 불신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생략되고 왜곡된 과거는 믿을 가치가 없어보였다. 하지만 부하라의 ‘이스마일 사마니 영묘(Ismoil Somoni Mausoleum)’처럼 1000년이 넘게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해온 건물들을 직접 보면서 역사의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지금처럼 생생한 현실이 과거에도 있었고 그때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 살았다는 게 분명했다.

티무르 칸을 비롯한 많은 왕들은 자신의 시대가 곧 역사의 시작과 끝인 것처럼 살다가 죽었다. 그들은 일을 하고, 가족을 꾸리고, 전쟁을 하고, 열심히 살다가 이름과 건축물을 남긴 채 죽었다. 그들의 죽음 이후에도 역사는 끝나지 않은 채 계속 이어졌고, 지금은 우리가 그 연장선 위에서 살아가고 있다. ‘욜로(YOLO)’를 외치며 인생이 끝나면 모든 게 끝나는 듯 현재에 충실한 청춘들의 모습은 티무르 칸의 모습과 닮아 있다.

역사는 우리의 죽음 이후에도 이어질 것이다. 우리 앞 세대가 그랬듯 우리가 죽으면 그 다음 세대가, 또 그 다음 세대가 살아갈 것이다. 그렇게 흘러오고 흘러가는 긴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한 명의 인간은 하나의 점처럼 보인다. 키르기스스탄과 타지키스탄에선 자연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느꼈는데, 우즈베키스탄에선 역사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깨달았다.

그럼 어떻게 살 것인가. 아직도 풀지 못한 문제다.

/스냅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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