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Z 세대를 위한 뉴스

snaptime logo

[르포]삶의 애환에 웃고 울린 '홍쌍리 시인' 북콘서트

311만 명. 전국의 문맹자 수다. 요즘 들어 글을 읽고 쓰지 못하는 건 극히 드물다지만 노인들은 얘기가 다르다. 시대적인 상황과 형편 탓에 글을 배우지 못한 노인 문맹률은 여전히 높다. 가족을 위해, 국가를 위해 배움을 희생해야 했던 이들의 아픔을 위로해 줄 수는 없을까. 노인 문맹자들을 위한 공연이 지난 9일 극동방송 아트홀에서 열렸다.

공연장 앞 안내데스크에서 진행 스테프들이 안내책자를 나눠주고 있다(사진=민준영 인턴기자)


20분 전부터 공연장을 메운 사람들

지난 9일 점심시간을 넘긴 오후 1시 40분. 상수역 극동방송 앞에 전세버스 한 대가 들어섰다. 연배가 지긋해 보이는 노인들이 우르르 내리더니 방송국 안으로 입장했다. “천천히 들어가셔도 돼요 어르신. 아직 시간 많이 남았어요.” 한시가 급해 보이는 노인들의 발걸음에 안내 직원들이 서두르지 말라며 천천히 부축했다.

이날 방송국 앞, 때아닌 구름 인파가 모인 이유가 있다. 지난 3월 시집 ‘행복아 니는 누하고 살고 싶냐’를 출간한 매실 명인 홍쌍리 선생의 북콘서트 행사였던 것. 버스에서 부랴부랴 내린 노인들은 다름 아닌 평택 국가문해교육센터에서 한글 공부를 하는 노인들이었다. 평택은 물론 신갈과 수원 등지에서도 공연을 보기 위해 모였다. 이들뿐 아니라 홍쌍리 선생의 유명세를 알고 개별로 참석한 시민들도 많았다. 늦을세라 서둘러 이들을 따라 들어가자 군데군데 공연을 알리는 포스터가 먼저 반겨줬다.

아트홀에 들어서자 공연 10분 전 스테프들이 분주하게 기기를 조작하고 있다 (사진=민준영 인턴기자)


그들끼리의 공감대를 보듬던 노래

“어르신들 밀리는 정체 길을 뚫고 먼 길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객석이 어느 정도 정돈되자 공연을 기획한 신혜원 문화나눔초콜릿 대표가 입을 열었다. 마이크가 울리자 일제히 집중하고 앞을 바라봤다. 신혜원 대표는 "매실에 대한 얘기만 나오면 눈빛부터 달라지면서 농사에 대한 자부심을 보이는 분"이라고 홍쌍리 시인을 소개했다. 이날 공연에는 배우 최불암 씨와 고두심 씨, 김석훈 씨를 비롯해 KBS 아나운서들과 성우들도 재능기부로 참석해 시낭독을 함께했다.

"엄마, 그곳이 얼마나 좋으면 휴가도 한번 없노 엄마."

홍쌍리 시인은 공연 시작부터 노래를 불렀다. 홍쌍리 시인의 자작곡 '엄마 딸'이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읜 홍쌍리 시인의 애환이 담긴 노래를 부르자 관객석 이곳저곳 코를 훌쩍였다. 노래가 끝나자 홍쌍리 시인도 애써 감춰왔던 눈물을 쏟아냈다.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을 감추고 살던 이들은 노래를 통해 다시 어머니를 기억했다.

노래가 끝나고 홍 시인이 뒤늦은 인사를 하자 박수갈채가 이어지고 일부 관객은 '당신을 응원합니다'가 적힌 현수막을 높이 들어 올리기도 했다. 북콘서트에서 울린 노랫가락. 엉뚱할 법하지만 이날 콘서트는 이렇게 노래와 시 낭독이 함께했다. 그렇게 관객들은 감정을 숨기지 않고 마음껏 웃고 울었다. 홍쌍리 시인을 비롯한 참석자들 역시 그들과 같이 교감했다.

홍쌍리 시인과 배우 최불암 씨가 무대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사진=민준영 인턴기자)


홍쌍리 시인은 노래를 마친 뒤 그가 존경한다는 배우 최불암 씨를 소개했다. '요즘 것들'에게도 아직까지 인지도가 있는 최불암 씨가 등장하자 손을 모으며 집중하는 사람들도 곳곳 보였다. 그는 홍쌍리 시인과 친분이 두터운 듯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눴다. 최 배우는 재치도 더했다. "제가 오늘 왜 왔냐면 (홍쌍리 시인이) 때 되면 꼭 반찬을 만들어서 보내더라고요"라는 말에 좌중들은 박장대소를 하기도 했다. 가벼운 웃음을 유발한 농담에 공연장 분위기는 더 활기가 돋았다.

최 배우는 단시 '반딧불아'를 낭독했지만 큰 울림을 줬다. 여자로서 말은 못 하고 심부름과 배려를 해야 했던 당시 시대상을 '소리는 못 내도 가슴을 태워 빛을 내는 반딧불'로 비유한 시다. 외롭고 힘들어도 가족을 위해 희생해야 했던 모습이 빛을 내는 반딧불과 닮아 낭독 후 공감의 박수가 이어졌다.

뒤이어 이규원 KBS 아나운서가 '눈물아'를 낭독한 뒤 쌍둥이 가야금 듀오 '가야랑'이 나와 흥을 돋웠다. 30분가량 차분해진 분위기를 띄우기에는 제격이었다. 인생의 희로애락을 함축한 가야금 산조로 분위기를 바꾸자 박수 소리도 가일층 힘이 붙었다. '수리수리마수리'와 '진도아리랑'으로 노래를 이어가자 가수와 관객들은 "얼씨구"와 "좋다"로 교감을 나눴다. 손녀뻘 되는 가야랑의 노래에 흐뭇한 미소를 보이며 "좋다~"라는 추임새를 연발했다.

KBS 안현서, 남유정, 이자영 성우들의 응원에 노래를 부르고 있는 홍쌍리 시인 (사진=신혜원 대표 제공)


배우 고두심 씨도 이날 공연에서 자리를 빛냈다. 요즘 '동백꽃 필 무렵'이 한창 인기를 끌자 같이 있던 김홍성 아나운서는 "증말 동백이 없이는 지가 못 살 어유~"라며 유쾌한 콩트를 연출하기도 했다. 고 배우도 "남의 애기 키운다는 게 증말 어려운 일인디 엄마 오장이 끓는 것을 몰라"라고 재치 있게 맞받아쳤다. 다들 드라마를 보는지 몇 마디가 더 오간 상황극에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김홍성 아나운서와 배우 고두심 씨의 진행에 "역시 프로는 다르다"라고 치켜세운 관객도 있었다.

배우 고두심 씨는 자식에게 아무리 베풀어도 항상 죄스러운 부모님의 심정을 담아낸 '엄마가 미안해'를 읊었다. 홍쌍리 시인은 자식 입학식과 졸업식에 가지 못하고 딸한테 치마 한 장 사주지 못한 기억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당시 자식들에게 한없이 미안했던 마음을 담아 적어낸 시가 '엄마가 미안해'였다. 하지만 아낌없이 줘도 항상 부족한 게 부모의 마음이라 하지 않았던가. 이 시를 듣던 누군가의 어머니들은 또다시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관객을 보러 온 문해학습자 노인들이 공연 뒤 단체로 사진을 찍고 있다(사진=신혜원 대표 제공)


"글 배우는 어르신들도 글로 표현하는 세상 됐으면"

이날 또 눈길을 사로잡은 건 문해학습자 박정윤 할머니의 자작 시었다. 올해 성인문해교육 경기도지사 상을 받은 박정윤 할머니는 '봄을 품은 내 인생'을 선보였다. 박정윤 할머니는 올해 63세로 뒤늦게 문해학습센터에서 한글을 배웠다. 박 할머니의 낭독은 관객들에게 귀감이 됐다. 문해학습자들은 1년에 한 편씩 시를 쓰는데 이들이 쓴 시를 직접 듣는 기회는 흔치 않다. 박 할머니가 직접 쓴 시를 직접 듣자 공연 초반에 등장했던 '당신을 응원합니다' 현수막이 다시 한번 들썩거렸다.

한 시간 반가량의 공연이 마무리되고 시 낭독과 공연을 선보인 참가자 몇 명과 관객들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다 같이 사진을 찍기 위해서였다. 사진 속 관객들과 참가자들은 손 하트를 들어 올리며 하나같이 미소를 잃지 않았다. 열세 차례의 공연 프로그램에 울고 웃으며 한껏 여유가 생긴 표정이었다.

이들은 군대 간 아들이 보낸 편지를 읽지 못해 속앓이하던 시절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은행에 갈 때마다 오른팔에 붕대를 감고 입출금증을 쓰지 못하는 척 연기를 해야 했던 기억이 또렷하다. 이제 오랜 시절 글을 못 배워서 맺힌 한을 뒤로한 채 이름을 쓰고 간판을 읽을 줄 알기에 자신감을 채워나가고 있다.

신혜원 대표는 "고단한 인생을 이해하는 홍쌍리 선생의 시에 문해학습자들이 많이 위로받고 해소했으면 좋겠다"라며 이번 공연의 취지를 밝혔다. 홍쌍리 시인의 힘든 순간들이 문해학습자들의 지난날과 비슷하기에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위로했을 것이라고 전망한 것이다. 아울러 "지금 늦게 글을 배우는 어르신들도 홍쌍리 선생님처럼 고되거나 즐거울 때 글로 표현하는 세상이 되길 바란다"고 기대했다. 사단법인 문화나눔초콜릿은 이렇게 매년 문해학습자들과 함께하는 귀한 시간을 함께하고 있다.

/스냅타임 민준영 기자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