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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수선 아닌 책에 담긴 시간과 의미를 수집하죠”

우연히 시작한 책 수선에 푹 빠져
'수선'이라는 기술에 감성을 더해
"30년 넘은 결혼앨범 수선 기억에 남아"
유튜브·출간 등 통해 책 수선과정 즐기기 바라

(사진=이수빈기자)

낡아서 소매 끝이 헤져도 버리지 않는 옷이 있는 것처럼, 종이가 다 떨어지고 부서져도 간직하고 싶은 책이 있다. 그럴 때 책을 고쳐주는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

트위터에서 팔로어가 20만명이 넘는  ‘재영책수선’이 바로 그런 곳이다.

쓰고 버리는 게 더 익숙한 현대 사회. 수선으로 추억까지 되살리는 책 수선가 ‘재영’씨를 서울 서대문구에 있는 그의 작업실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진=이수빈 기자)

우연히 시작한 책 수선…”다양한 분야 접해본 게 지금의 자산”

‘책 수선’이라는 분야는 생소하다. 종이로 만들어진 점을 감안하면 책 커버나 페이지가 훼손되면 버리거나 종이류 재활용품으로 분리수거를 한다는 생각이 쉬워서다.

영화 ‘광식이 동생 광태’에서 배우 김아중이 옛날 책을 수선하고 새롭게 제본하는 모습을 그려보면 ‘아~’하고 느낄 수 있다. 영화 속 김아중의 직업은 ‘를리외르’, 우리말로 하면 ‘예술 제본가’다.

재영씨는 “제가 하는 일은 책 수선과 보존에 방점이 찍혀 영화 속 김아중 씨의 일과는 조금 다르다”고 전했다.

그는 “미국에서 북아트와 페이퍼메이킹(Paper Making, 종이를 재료로 하여 작품을 만드는 일)을 공부하다가 책의 구조를 공부할 필요를 느꼈다”며 “그러면서 책 수선의 세계에 우연히 발을 들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당시 지도교수가 책 제작에 필요한 기술을 배우려면 책 수선 일을 추천했다”며 “학교 도서관에서 책 수선일을 시작하면서 그 매력에 빠지게 됐다”고 덧붙였다.

특히 시간의 흐름이 주는 자연스러운 변형이 재영씨에게는 매력으로 다가왔다.

재영씨는 “책이 망가지려면 물리적인 힘이 작용했거나 시간이 축적이 돼서 자연적으로 서서히 망가지거든요. 그런데 저는 시간이 축적돼서 형태가 바뀌는 것들에 관심이 많아요”라고 했다.

심지어 그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책의 기억을 관찰하고 파손된 책의 형태와 의미를 수집합니다’라고 적었다. 단순히 책을 수선하는 기능보다는 파손된 책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그의 의지가 반영된 것.

책 수선 전에 재영 수선가가 공부했던 건 순수미술이다. “순수미술을 공부하며 재료도 여러가지를 써보고 그러다 보니 새로운 분야를 한다는 거에 거부감이 적어서 (책 수선에도) 시작했던 것 같아요”

대학 졸업 후 디자인스쿨에서 디자인을 배워 그래픽 디자이너로 잠시 일을 했다. 이후 북아트를 전공하러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가 책 수선가로 일을 시작한 재영 수선가는 “처음엔 불안했다”고 말했다.

“전공을 이렇게 바꿔도 되나, 그런 조바심이 들 때가 있잖아요.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했던 공부들이) 다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수선’이라는 기술에 감성을 더해

재영씨에게 맡기는 책은 찢어진 종이를 붙이거나 오염을 지우는 데 그치지 않는다. 어떨 땐 아예 새로운 표지를 만들고 책장을 제작하기도 한다.

오래된 만화책들을 수선하고 그에 맞는 책꽂이까지 제작했다. (사진=재영책수선)

박물관에서 고문서를 다루는 전문가가 책 수선을 하는 것은 익숙하지만 재영 씨는 민간에서 책 수선을 한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할머니의 일기장, 어머니의 그림집, 온 가족이 함께 쓴 옥편 등이 재영씨의 손을 거쳤다.

전문 기관에 소속되지 않고 개인 공방을 연 계기에 대해 “책 수선 일을 하면서 개인적인 작업도 병행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책 하나하나마다 담긴 사연이 있기 때문에 도서관에서 일할 때와는 또 다른 재미가 있다”고 덧붙였다.

재영씨는 “책 수선을 하는 게 사실 흔한 일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책이 수선됐을 때 의뢰자분들이 자신에게 의미있는 책을 돌아왔다고 반기는 것을 보면 망가진 걸 고치는 기쁨이 있어요”라고 했다.

 

내가 만나는 모든 책이 ‘희귀서적’…”부담이 될 때도 있지만 보람차”

그는 트위터에 책 수선 과정을 꾸준히 올린다. 수선 전후 사진을 보고 사람들이 놀라고 좋아하지만 사진으론 미처 담지 못하는 어려움도 있다.수선해서 간직하고 싶을 만큼 소중한 책, 하나 밖에 없는 책이니 모두가 희귀서적인 셈이라며 수선할 때마다 늘 긴장된다고 말했다.

“제가 그걸 망치면 어디서 그걸 다시 구할 수 있겠어요.” 지금껏 망친 적, 의뢰자가 실망한 적은 없지만그래도 긴장되는 건 마찬가지다.

이렇듯 모든 책이 각자의 사연을 갖고 있어 기억이 나지만 재영 수선가는 특히 기억남는 책으로 신지식 선생의  ‘빨간머리 앤’ 초판 번역본을 꼽았다. 신지식 선생은 국내에 ‘빨간머리 앤’을 처음으로 소개했다. 재영 수선가는 “어릴 때 만화 ‘빨간머리 앤’을 좋아했거든요. 지금은 그 초판 번역본을 구하기 굉장히 어렵다고 하더라고요. 수선가니까 만날 수 있었지요.”라고 말했다.

최근 다룬 책 중에서 기억에 남는 책으로는 결혼앨범을 들었다.

1988년에 결혼한 남편이 곰팡이까지 낀 결혼앨범을 들고 찾아온 것. 재영씨는 “남편 분이 결혼앨범을 수선해서 아내에게 다시 선물하고 싶다고 가져왔다”며 “이런 선물을 만드는 데 일조할 수 있다는 게 너무나 기분이 좋았다”고 전했다.

그는 “수선 가격이 싸지도 않고 기간도 한 달이나 걸렸지만 남편 분이 수선본을 수령한 후 ‘돈이 하나도 아깝지 않다’고 기뻐하는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했다.

(사진=재영책수선)

 

“수선 과정까지 공유하고 싶어”…유튜브·출간 등 활동 다양

실물인 책을 직접 만지다보니 아날로그의 느낌이 강하지만 정작 재영씨는 “디지털을 좋아해요”라고 했다.

필요할 때에는 컴퓨터 그래픽을 활용해 수선해야 할 작품을 테스트하기도 한다. 그는 “모든 걸 수작업으로 하다고 해서 가치가 높아지는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사진=재영책수선)

그는 지금도 꾸준히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재영씨는 “배운 기술들은 말 그대로 수선의 기본에 불과하다”며 “작업을 할 때에는 기본 기술을 얼마나 변칙적으로 활용하는가가 중요해요. 그런 건 오롯이 경험이 쌓여야 하는 일이거든요”라고 했다. 지금도 재영씨는 수선방법을 모를 때에는 사수에게 끊임없이 물어본다.

재영씨는 책 수선이라는 분야를 널리 알리기 위한 노력도 병행하고 있다.

책 수선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원데이 클래스를 열어달라거나, 책을 내달라는 요청이 꾸준히 온다.

재영씨는 앞으로 책을 낼 계획도 갖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지난해 9월부터 올해 5월까지 ‘리디셀렉트’에서 18편의 글을 연재했다.  유튜브 채널 ‘재영책수선’에는 책 수선 과정의 ‘소리’만 담긴 영상을 업로드했다.

재영씨는 “단순히 수선 전후를 비교해 (책 수선이) ‘신기하다’는 것 뿐만 아니라 책 수선가라서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을 소개하고 싶다”며 결과물뿐만 아니라 과정도 사람들이 보고 듣고 즐길 수 있도록 만들고 싶다고 강조했다.

 

/스냅타임 이수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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