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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사는 세상, 부끄러움을 썼던 이한열이 지금 청년들에게

(사진=스냅타임) 이경란 이한열 기념관 관장이 이한열 열사 유물 앞에 서 있다.


“한열이가 뇌사상태에 빠졌다는 얘기를 듣고 제일 먼저 떠오른 사람은 박종철이었어요. 한열이가 일어나길 바랐지만 시신까지 빼앗길 수는 없었어요. 그날 저녁부터 한열이가 세상을 뜬 7월9일까지 한 달 동안 하루에 약 500명의 학생들이 24시간 한열이 병실로 가는 모든 길목을 지켰죠”

1987년 6월. 그해는 전두환 군사정권에 저항해 일어난 민주화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된 해였다. 1월에 일어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은폐·축소된 것이 밝혀지고 4.13 호헌조치와 이한열 열사가 머리에 최루탄을 맞아 사경을 헤매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민주화운동의 열기는 고조됐다. 결국 6.29 선언으로 국민들은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다.

스냅타임은 6.10 민주항쟁 32주년을 앞두고 이한열 열사를 기억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이한열 기념관을 방문했다. 그리고 이경란 이한열 기념관 관장을 만나 1987년 민주화운동 과정과 이한열 열사에 대해 자세히 들어봤다.

(사진=스냅타임) 이한열 기념관에 전시돼있는 이한열 열사 초상


“5.18 비디오 보고 하늘과 땅이 뒤집힌 것 같았다

이 관장은 1987년 상황이 눈앞에 펼쳐진 듯 생생하게 설명했다.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국민을 학살했던 군부 정권이 권력을 잡는 시기부터 이한열 열사가 머리에 최루탄을 맞고 6.29선언 이후 이한열 열사가 세상을 뜬 그날까지 역사적 배경을 하나씩 되짚어 나갔다.

당시 학생들이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결정적인 계기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었다. 이 관장은 “1학년 때 광주 비디오를 봤는데 당시에는 그 비디오를 보기만 해도 경찰들이 잡아갔기 때문에 학생회관 1층 철문을 다 걸어 잠그고 거기서 봤던 걸로 기억한다”며 “비디오를 본 게 점심시간 전이었는데 아침 먹은 것도 다 토하고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거짓 같고 하늘과 땅이 뒤집어 지는 느낌이었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대통령이 국민을 죽이고, 국민을 지키는 군대가 국민을 죽이고 그리고 그 사람이 권력을 잡는 것이 우리나라라니 끔찍했다”며 “광주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어간 현실이 잘못됐다고 외쳐야 한다는 생각이 가장 컸던 것 같다”라고 설명했다.

(사진=스냅타임) 압수수색 영장에 적힌 압수할 문건 : 이한열의 사체 1구


한열이를 절대 빼앗길 수 없어 500여 명이 24시간 지켰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전말이 밝혀진 것은 국민들의 분노가 한계치를 넘어서게 한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그는 “그전에도 많은 고문 사건이 있었지만 수많은 요인들이 겹쳐지면서 드디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세상에 알려졌고 사람들이 정말 이 나라가 잘못됐다는 것을 인지하게 됐다”라고 말했다.

그해 5월 말에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만들어지면서 6월10일 대규모 시위가 기획됐다. 시위 계획은 전두환 정권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이 저녁 6시가 되면 길 가던 사람은 손수건을 흔들고 차를 타고 가던 사람은 경적을 울리고 모든 교회, 사찰, 성당은 종을 울리기로 했다. 시위 전날 연세대학교에서는 학생들이 결의를 다지는 시위가 있었고 이한열 열사도 그 시위에 참여했다.

이 관장은 “한열이는 당시 학생들이 본대가 스크럼을 짜고 교문 밖으로 나가면 시위하는 본대를 보호하는 역할을 했었다”고 말했다. 그날은 이한열 열사가 몸이 안 좋아 학교도 못 갔는데 시위를 위해 작은 매형에게 데려다 달라해 그 차를 타고 학교에 왔다 평소 최루탄은 허공을 향해 쏘고 백골단이라고 불리는 사복경찰 체포조가 뛰어들어오는데 그날은 최루탄을 사람을 향해 직격으로 쏘았다. 그 최루탄을 이한열 열사가 맞은 것이다. 그리고 이한열 열사는 뇌사상태에 빠졌다.

당시에는 경찰이 본인들의 책임을 피하려고 시신을 탈취해 화장하고 뼛가루만 돌려주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500여명이 이한열 열사 병실로 가는 모든 길을 한 달 동안 24시간 돌아가면서 지켜야 했다.

(사진=스냅타임) 이한열기념사업회 로고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되지만 기억의 방식은 다를 수 있다

역사적 사실들에 대해 설명을 마치고 이 관장은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기억의 방식은 시대마다 다른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이 관장은 “얼마전에 김군이라는 영화를 봤는데 이전 5.18 영화들과 달리 그 시대를 겪지 않은 30대 감독의 영화라 5.18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정말 궁금했다”며 “그런데 영화가 부채감이나 트라우마 없이도 훨씬 더 절절하게 5.18을 그려낸 모습을 보며 다음 세대가 이한열을 어떻게 기억할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이한열을 기억할 근거인 기록이나 유물 등을 제대로 남기면 기성세대가 원하는 방식이 아닌 다음세대의 방식으로 이한열을 기억해 나갈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하지만 민주화 운동을 왜곡하는 행동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이 관장은 “얼마전에 길을 가는데 어떤 분이 5.18이 벌써 39년이나 지났는데 왜 아직도 세금을 줘야 하냐며 큰소리 치는 분이 계셨다”며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은 100년이 지났는데 그분들은 100년이 지났으니 잊어버리고 지나가도 되는 걸까라는 생각을 했다”라고 말했다.

이어 이 관장은 “몇몇 정치군인들이 권력을 잡겠다고 자기 휘하 군인들을 동원해서 국민을 죽이고 권력을 잡았는데 거기에 항거한 역사를 잊어도 되는가”라며 “공동체가 공동체 전체를 위해 개인을 희생하신 분에게 합당한 예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앞으로 이한열기념사업회는 여전히 민주 유공자로 지정되지 않은 전태일 열사, 박종철 열사, 이한열 열사 등 민주화 운동을 위해 본인을 희생해 돌아가신 많은 분을 기리고 예우하기 위해 민주유공자법 제정을 위해 노력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진=스냅타임) 이한열 열사의 운동화와 유고시


함께 사는 세상, 부끄러움을 썼던 이한열이 지금 청년들에게

이 관장은 이한열 열사가 생전에 썼던 글들 중 몇가지 문구를 소개했다. “행동하는 사람으로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 젊음이란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나이이다, 함께 사는 세상, 나는 나에게 나는 나를 숨기지 않을 것이다” 이 관장은 이한열 열사가 굉장히 감정이 섬세하고 철학적이며 자기 성찰적인 글들을 굉장히 많이 썼다고 소개했다.

그리고 다시 1987년을 회상했다. 그는 “대학 시절에 광주를 안 상태에서 그렇게 살지 않을 수 없었다”며 “그렇게 안 살려면 그럴 수 있었지만 스스로에게 너무 창피해서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라고 말했다. 민주화 운동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가장 좋은 삶이었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현재를 살아가며 여러 사회문제에 연대하는 청년들을 보면 많이 외로워 보이지만 그 생각을 지지하며 연대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물질적으로는 더 풍요로워졌다고 하는데 소수자에게는 왜 더 가혹해지는지, 정보는 훨씬 더 많고 판단의 기준도 훨씬 더 많아졌는데 왜 나와 다른 사람에 대해서 혐오하고 못 견뎌 하는지 맘이 아프다”며 “모두 같아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지금은 외롭고 힘들겠지만 그대들의 삶으로 증명될 것이다”라며 따뜻한 위로 한마디를 던졌다.

한편 6월 7일 이한열 열사 32주기에 맞춰 올해도 연세대학교에서는 이한열 추모식과 이한열 문화제가 열린다. 14시 30분부터 연세대학교 이한열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진행하는 추모제가 있고 오후 3시부터는 추모식이 진행된다. 또 19시부터는 이한열 문화제가 열려 이한열 열사의 정신과 역사를 기억하는 시간을 가진다.

/스냅타임

[정성광, 김정은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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